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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2월 제주 남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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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제주 남원으로.


송당리에서 자전거로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은 몇군데 있다. 주로 내리막을 이용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세화, 성산, 멀게는 표선까지도 한두시간 안에 갈 수 있다. 세화나 성산은 내리막의 연속이라 지선을 잘만 이용하면 한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자전거는 되도록 오후 세네시를 넘기지 않는 선에서만 타고 나머지 시간은 느긋하게 쉬자고 계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용눈이 오름을 내려와 주변 들판을 달리는데 몸이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숙소를 일찍 정하고 쉬어야할 판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종달리로 이어지는 지선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자전거를 몰아나갔다. 페달링이 필요없는 길이라 다행이었다.




늘 가던 숙소에 들르니 이곳은 자리가 많았다. 재빨리 씻고 나와 늘 가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뭐랄까, 살짝 약이 오르면서 일정이 꼬인 것에 대한 분풀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제대로 술에 취해볼 작정이었다. 관광지의 식당은 늘 그렇듯이 한사람 손님 받기를 꺼리는 곳이 많다. 최대한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늘 들르던 곳이었음을 강조하며 자리를 구했다. 방풍자켓의 요란한 디자인을 기억했던 것인지 위아래로 훑어보던 주인장은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기분 좋게 앉았으나 어쩌자고 그새 돼지고기 일인분의 가격이 올라 삼인분을 시키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 눈치를 보며 이인분을 시켰는데, 양이 혼자 먹기에는 약간 버거웠다. 고기 먹고 밥 먹고 술 먹는데 고기가 남네. 소주 일병을 더 시켰더니 이제는 술이 남고 안주거리 고기가 부족한 형편이 되고 만다.


세상살이의 불균형이 대체로 이따위다.


젊으면 돈이 없어 못다니고 늙으면 돈은 있는데 힘이 없어 못다니게 되는 것과 흡사한 모양새다.



취기는 올라 오고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서 고기와 김치를 정렬하면서 혼자 놀았다. 놀고 있는데 한쪽 눈자락 아래의 신경이상으로 눈빛이 마주치면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며 윙크를 자동으로 해대는 식당 찬모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옆자리에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문을 받는데 못알아 먹겠으니 뭐라고 하는지 알아봐달라는 내용이다. 그쪽을 일별하니 여성 여섯인데 전혀 외국인 냄새가 안난다. 그냥 한국여성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다. 알았다고 다가가 한 여성의 말에 귀를 귀울이니 떡볶이 있냐? 그걸 먹고 싶다는 거다.


이건 통역하나 마나한 내용이지만, 찬모에게 떡볶이 있냐고 묻는대요? 하니 찬모의 눈자락 아래가 더욱 심하게 경련하고 입꼬리는 더 올라가며 손사레를 친다. 그 여성들에게 고개를 돌려, 없다고 하네요. 여긴 돼지고기집이니까요. 그런데 대만에서 오셨나요? 하고 되물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 도회적이어서 국적이 궁금했던 거다.


여성들이 타이완이라는 말에 대해 의식적으로 모르는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처음엔 자기네들끼리 쑤근쑤근 하더니 무리 중에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아주 선명한 중국어 발음을 자랑하며 우리는 샹! 하이~에서 왔습니다 라고 한다. 아 그렇군요. 제주에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격하게 사랑하는 한라산 소주 일잔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돼지고기 기름에 잘 튀겨진 김치 한조각에 고기를 포개어 입안에 넣는다. 고기를 씹으며 중국여성들의 자리를 곁눈질로 살핀다.


한 여성이 상추에 돼지고기와 쌈장을 올리고는 쌈을 두손으로 쥐고 햄버거 베어물듯 절반을 어렵게 잘라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햄버거에 익숙한 상해처자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김정일이 상해를 방문하여 상해가 천지개벽됐다! 하고 절규한 때는 2001년이다. 김정일의 어법은 꽤 소극적인데, 상해가 저절로 천지개벽된 것이 아니라,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중국지도부와 중국인민들이 상해를 개벽한 것이다. 그로부터도 다시 강산이 한 번 반 변한 세월이 지났으니 상해는 이미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옆에 앉아서 제주의 맛집을 찾아온 저들은 자본의 세례를 듬뿍 받은 상해에서 태어나 그곳의 화려함 속에서 양육된 젊고 패기 있는 청년들인 것이다. 저마다의 손에는 스마트폰을 하나씩 들고 있고 이미 제주를 들렀던 친구들의 실시간 SNS지도까지 받아가며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의 층위가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지정학적인 운명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들과 더 부대끼며 살아가야할 것이다.


술로 후끈해진 얼굴을 하고 가게를 나선다.


콜리로 보이는 대형견 한마리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다. 주변에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불안한 시선만 주던 개가 승용차만 지나가면 급하게 도로로 뛰어들어 차의 뒷문쪽으로 짖으며 돌진하기를 거듭한다. 제주는 아무리 풀어 키우는 개가 많아도 대부분 백구 황구다. 저래 고급진 견종을 풀어 키우는 예는 드물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승용차가 지나가자 개는 찻길로 차 뒷문으로 돌진한다. 허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개는 이내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류장으로 되돌아온다.


주인이 개를 버리고 갔나?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중년여성이 경찰에 신고를 한다. 유기견으로 판정을 받으면 개의 남은 여생은 그리 간단치가 않을 것이다. 평소 친하지 않은 개의 팔자를 근심하며 2월 답지 않게 훈풍이 부는 성산의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남은 내 팔자가 거리를 넘나들던 그 개와 같지 않기를 나는 바랐다.


깊은 잠에 빠진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제주는 검은 구름과 해무에 싸여 있었다. 바람의 강도가 대단하였다. 이런 날씨면 자전거의 평속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늘 제주여행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들렀던 성산을 이번엔 불가피하게 첫날에 오다보니 그 이후가 막막하였다. 뭐, 역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면야 이런 고민도 없었을 거지만, 자전거로 다니니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남원 갈까?


남원 가자.


그렇게 결정하니 남원 갔다가 다시 성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정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자전거 여행자에게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가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해서 남원 갈 때는 지방도 1132를 타고 다시 성산으로 올 때는 최대한 해안도로를 타기로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죽을 얻어 먹고 길을 나서는데, 전날의 훈풍과는 차원이 다른 차갑고도 세찬 바람이 불어댔다. 자전거 타기로는 최악의 기상여건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성산에서 거꾸로 서귀포 방향으로 달려본 것은 두번째다. 해서 썩 낯설지는 않았다. 이전과 다른 풍경이라고 한다면 온평리부터 신산리까지 길가에 결사, 목숨을 걸고 제2공항을 반대한다는 깃발이 바람의 세기에 맞추어 제몸을 치열하게 흔들고 있었다.


입바른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간질거린다.


내가 사는 곳이 신산리라면 반대 찬성 어느쪽에 서야 하나를 고민하며 달리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우왁! 귤이다.



남원을 십 킬로미터 남겨두었다는 이정표 앞에 누군가 흘리고 간 감귤이 스무개 남짓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고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차량이 없다. 냉큼 귤 한알을 주워 껍질을 까본다. 햇빛에 예열되어 온기가 흐르는 과육은 은근히 질기게 버티다가 내 엄지손가락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껍질과 함께 툭, 하고 터진다.


노지 감귤의 껍질이 이렇게 대체로 얇은 것으로 안다. 아이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긴 다음 한입 덥썩 깨물어보는데 아... 이게 제대로 된 제주감귤맛이구나 싶은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찬다.


나는 땅거지가 되어 그 자리에서 일곱개를 까먹고 네개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에 공간이 있었더라면 더 챙겼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남원읍이 나왔다. 거참. 그렇게 세게 불어대던 바람도 희안하게 남원에 접어드니 잦아들고 얼쑤, 하늘까지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사람들이 남원을 살기좋은 동네라고 하는 것일까?


내 이 궁금증을 반드시 풀고야 말리라.


뭐 그건 그렇고 무려 파리 빵 상점도 있는 남원에 도착하고 보니 정확히 열 두시였다. 과음한 다음날은 아침에 화장실을 세 번은 들러야 한다. 그 후로도 뭘 먹는다는 것이 두렵다. 장에 탈이 날까 두려운 것이다. 여행중이면 더더군다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분식점에 들러 제일 만만한 멸치국수를 시켰는데 옆자리에 젊은 친구들 테이블을 보니 그 차림새가 거창하기 이를데 없다.



메뉴판을 보고 이것이 서귀포에서 그 유명하다는 바로 [모닥치기]임을 알 수 있었다. 김밥 떡볶이 순대, 이른바 김떡순을 한 번에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조어를 그렇게 하였나 보다.


육지와는 다른 중면에 약간 심심한 멸치국수를 후루룩거리다가 염치불구 사진 한장 찍자고 부탁하여 기록에 남겼다. 다시 남원에 오는 날이면 내 반드시 저 모닥치기를 먹으리!


남원은 제주의 어떤 곳보다 워싱턴 야자수의 키가 우뚝하고 골목 여기저기 심지어 길가에 감귤나무 조차 건강하고 달게 보였다.




위미리에 당도하여 이리저리 헤매인다. 동백꽃 군락지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입구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마을의 끝과 끝을 두 번 왕복하다가 찾아간 곳이 공천포의 작은 음식점이었다. 음식점은 경주에 갈 때마다 숙소로 정하는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장과 친구인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이 한 번 꼬이면 거푸 꼬이는 것이 다반사인지라 인연을 풀어놓으며 퍼질고 앉을 상황이 아니었다. 식당의 작고 해풍에 풍화된 간판과 출입문은 가히 제주스러웠다.


가게 앞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이렇게 물었다.


- 위미리 동백꽃 유명한 곳을 찾고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나요?


음식을 만들던 중인 주인장 요네는 이렇게 말했다.


- 위미초등학교 아래쪽인데... 근데 동백꽃 다 졌어요.


머시라? 꽃이 다 졌다고라!


- 아... 망했네요. 바람에 고생하며 그거 보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이고!


가게 안의 커플들은 재밌다고 킥킥거렸다. 일하고 있는 사람 더 붙잡고 있을 수도 없고 얼른 나왔다. 수확이라면 공천포도 알았고 그 앞 주방상회에서 밥 먹고 술 먹는 재미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다음을 기약하였다.




위치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올레길을 따라 꾸역꾸역 동백꽃 군락지를 찾아 나섰다.



그 길의 중간에 원래 계획에 있었던 숙소와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송당리에 묵었다가 다음날 저녁에 이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바닷가에 바짝 다가앉은 아래 가게에서 닭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실 계획이었다.


다들 어쩌면 이렇게 좋은 자리를 찾아내는 것인지 젊은 제주 이주민들의 눈썰미와 요령, 재간이 부러울 따름이다.



음식점 앞에 아래와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음식맛 술맛이 절로 나는 경치다.



위미리 도로가에서는 못찾아 갔는데 바닷가 올레길 표식을 따라 들어가니 마침내 거대한 규모의 동백꽃 무리가 나타났다.


요네의 말대로 동백꽃은 대부분 지고 없었다. 그래도 나무의 규모가 입을 벌어지게 했다. 이 큰 나무에 동백꽃이 맺혀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대단한 장관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꽃이 개별적으로 혹은 동시다발로 떨어질 때의 소리는 또 어떻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성산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돌렸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바람의 강도는 참으로 거셌다. 돌이켜보면 남원의 일부 구간을 빼고는 지속적인 맞바람이거나 정면에서 사십오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방향에서 바람이 자전거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자전거는 한시간 평속 십킬로미터 남짓. 예보에 따르면 이 바람은 잦아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정을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 나가다가 남원 주민 한분에게 다가갔다.


- 어르신, 제가 제주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동네가 남원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는데요.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 내가 알기로는 물이 좋다고 합니다. 제주 물이야 어디고 다 좋지만, 특히 남원 물이 좋다고 하네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심이 좋고요. 시골이야 어디고 다 비슷하지만, 이른바 텃새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남원은 제주에서 외지인에게 가장 인심이 후한 곳이라고 해요. 해서 이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원이 제일 살기 좋다는 말이 돌고 있지요.


- 저는 따뜻하고 바람이 덜 불어서 그런 말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 에이, 따뜻하기야 약간 더 아래 서귀포가 더 따뜻하지. 그런거보다는 솔직히 다른 곳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랐고 그나마 여기는 그래도 조금 덜하니까 그 이유가 가장 클 겁니다.


하긴... 그러고보면 서귀포와 성산 그 사이라 이전에는 스쳐지나가던 곳이다. 주목을 덜 받던 곳이 늦게 사람들 눈에 띈 탓도 있으리라.





돌아오는 자전거 길에선 네 팀 정도의 자전거 여행객을 만났다. 나와 같은 방향의 두 팀과 반대방향의 두 팀.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중학교 고학년과 고등학교 학생 정도 나이대의 여행객이 있었다. 다들 바람에 진이 빠질대로 빠진 상태였다.


제주에서 성산 일출봉 먼저 보고 서귀포 간다던 고등학생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바람에 치를 떨었다. 서귀포 도착하면 자전거 반납을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바람이 센 계절에 제주일주 완주에 성공하려면 되도록 가벼운 기어비, 그러니까 앞 체인링은 가장 작은쪽에 놓고 페달링 회전수를 높혀 속도보다는 느긋하게 라이딩하는 것을 추천한다. 바람에 이길 장사는 없다. 힘으로 페달을 밟다간 근육도 못버티고 안장통 때문에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아무려나 나또한 평소 같으면 한시간 반 정도 걸리던 거리를 이래저래 사진찍고 노닥거리고 바람의 방해도 받고 하며 네시간 반을 달리고 난 다음에야 다시 성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렸다고 하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느렸다. 바람이 앞에서 혹은 측면에서 세차게 들이받으니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갈 때도 맞바람 올 때도 맞바람, 이 해괴함이 제주 바람의 특징이다.




도미토리 숙소의 손님이라고는 두 사람 뿐이었다. 이 게스트 하우스를 오 년전부터 출입하고 있지만, 이렇게 한적하기는 처음이었다.


입사 이십주년을 기념해 특별휴가를 받았다던 직장인은 바베큐 파티가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제주의 2월은 설명하기에 난감한 결핍의 계절이었다. 그와 나는 그 결핍을 안주 삼아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언제나 꽉 차있던 공간이 비어 있으니 낯설었다. 빈 공간 사이로 지나간 나날들의 인연들이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그 이후로도 나처럼 제주를 다시 찾은 사람은 있는지... 이마가 뜨끈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눈물짓던 스물아홉살짜리는 그 꿈을 이루었는지.


괜히 맥주가 달았다.




다음날은 더 거친 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기도 하거니와 차기도 하였으니 집생각만 간절한 나머지 일정이었다. 국토의 가장 아래 남국에서 손이 얼다니.






월정리에서 곱은 손을 녹여가며 라면을 먹은 다음 제주항까지 덜덜 떨며 자전거를 탔다. 지금까지 제주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마지막날이면 늘 들던 생각이 있다.


하루나 이틀 더 머물렀다 갈까?


그러나 이번은 이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방안의 따뜻한 이불 아래가 간절할 뿐이었다. 내 한계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이젠 다 되었구나 하며 기죽은 채로 항구에 접어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뭔가. 항구에 도착하니 외국인 부부가 많이 되봐야 세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를 태우고 여행을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패니어의 짐만도 무시무시한데 거기에 트레일러까지.



바람이 불고 다시 가슴이 뛴다. 이 모습을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아쉬움이 남지 않게 원 없이 긴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 짐을 풀어야지 싶다. 파도가 높이 일고 바다로 채 복귀하지 못한 포말이 바람에 실려 날아온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폐부로 파고들었다. 절여진 내속이 다시 용기를 내라며 속삭이고 있었다./자전거여행의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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