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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2019 초여름 제주 자전거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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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초여름 제주 자전거캠핑

 

혜화동

 

모든 게 갖춰질 날을 기다리다간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서 텐트와 침낭, 패니어만 주문하고 배송이 완료되자 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은 훗날 더 긴 여행을 대비한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나는 집을 등에 진 달팽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자전거와 텐트뿐인 몸으로 길 위에서의 나날들에 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행선지는 자주 가서 식상한 감이 있는 제주였다. 익숙한 곳이고 해변을 따라 몇몇 무료 캠핑장이 있는 곳이어서 예행연습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다. 짐받이에 패니어를 걸고 준비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기고 나니 자전거의 전체 무게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였다. 살짝만 핸들을 잘못 놀려도 자전거는 중심이 흐트러지며 좌우로 쓰려지려 하기 일쑤고 앞바퀴는 속절없이 허공으로 치솟으려 하였다. 무릎에 걸리는 과부화는 덤이었다.

 

제주로 가는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첫 페달을 밝고 어느 정도 속도가 붙고 나자 습관처럼 입가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의식해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흥얼거리게 되는데, 유행가일 때도 있고 연주곡의 멜로디일 때도 있다. 그날의 기분이나 평소 마음 상태에 따라 불쑥 선정된 곡이 라이딩송(?)으로 간택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래가 정해지면 라이딩 내내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흥얼거리게 된다. 오월 중순 치고는 꽤나 더웠던 이날, 라이딩송으로 선택된 노래는 동물원의 [혜화동]이었다. 근래에 [응답하라 1988] OST로 더 유명해진 곡이다.

 

–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까지 페달링에 맞춰 흥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무의식에 의해 간택된 곡이 최근 내가 겪은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랬다. 자전거 캠핑을 계획하고 떠나기 얼마 전 나는 아주 오래된 친구에게서 전화 대신 메일을 받았다. 햇수를 따져보니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각자 살아내느라 어찌어찌 연락이 뜸해지더니 전화번호가 다들 010으로 바뀌면서 연락하려 해도 방도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친구는 용케 15년 전 주고받은 메일 주소를 찾아내어 연락을 한 것인데, 이쯤이면 옛친구를 다시 이어준 문명의 이기를 칭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친구는 병을 얻어 아주 멀리 떠날 뻔했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얼굴을 마주하니 큰병을 앓은 뒤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 예전 우리는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많이 웃었으며 매일 만나도 지겨워지거나 다툴 일 없었다. 헌데 이제는 인생의 남은 페이지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누구누구는 큰병에 걸려 오늘내일 한다는 소식이 그리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마냥 다음으로 미루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오래된 좋은 사람과는 더 자주 만나야 하고.

 

비키 아니고 Vㅣ키

 

제주행 배편의 티켓을 끊고 항구 주변을 서성인다. 대합실엔 단체로 자전거라이딩을 떠나는 장년의 동호회원들과 혼자 조용히 훌쩍 떠나온 젊은 자전거여행자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라이더도 서너 팀. 그중에서 멀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이었으면 하는 풍경에 눈길이 갔다. 장거리 여행용 자전거에 호기심을 가지고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자니 자전거의 주인인 노년의 외국인 여성이 다가와 질문을 한다.

 

– 자전거를 배에 실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냐? 제주는 처음인데 한 바퀴 도는데 얼마나 걸리냐? 자전거 타기에 제주는 어떠냐?

 

아는 대로 대답하고 대화를 이어가는데, 발음이 독특하면서 잘 안들렸다. 해서 당신의 발음이 조금 알아먹기 어렵다고 했더니 자신을 비키가 아니고 [브이발음]비키라고 소개한 할머니 자전거여행자는 웃으며, 호주사람이고 호주 엑센트가 조금 특이해서 처음엔 알아먹기 어려울 거라 했다. 그녀는 은퇴 후 호주가 겨울이어서 추운 이즈음에는 따뜻한 북반구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대만에 있었는데, 대만은 벌써 한여름 날씨여서 더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여기저기를 자전거로 라이딩 하고 마지막으로 제주를 달린 다음 중국을 거쳐 몽골까지 여행을 이어갈 것이라는 설명에 나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할머니처럼 나도 언젠가 그런 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더니 이런저런 조언을 쏟아낸다. 동행인 남편은 이런 일이 드물지 않은 듯 한구석에 멀찍이 떨어져 핸드폰으로 책읽기에 바빴다. 직접적으로 나이를 물어보면 실례일 듯해서 결혼한지는 얼마나 되었는지요? 하고 물으니 눈치 빠른 할머니는 80년대에 결혼했고 남편은 72 자신은 69세라고 하며 활짝 웃는다.

 

아! 저 나이에도 길 위에 있을 수 있구나. 용기가 불쑥 일어났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쉬?

 

그간 틈틈이 영어공부를 해왔다. 시험이나 성적 때문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 진지하게 다시 책을 잡은지 일여 년 지났다. 필요라는 것은 아래와 같다.

 

– 외국에 자전거여행 가서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서바이벌 잉글리쉬

– 좋아하는 자전거관련 외국 웹진의 기사를 95% 이상 오독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리딩능력

 

영어공부의 방법은 공부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표가 정해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공부법을 선택할 수가 없다. 막연히 영어를 네이티브(원어민) 수준으로 잘하고 싶다면 영어권 국가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지금이라도 이민을 가거나, 24시간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영어로 대화를 걸어주고 잘못된 표현을 수정해줄 영어권 국가의 사람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혼자 책이나 기타 미디어를 통해서 영어를 익히려고 한다면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거나, 팝송을 잘 이해하고 싶다거나, 해외여행 가서 현지인과 대화를 하고 싶다거나… 목표가 구체적이고 선명해야 그에 맞는 효율적인 공부법이 나온다고 믿는다.

 

어쨌든 위에서 언급한 목표에 따라 내가 선택한 공부법은 아래와 같다.

 

– 쉬운 문법책 무한반복으로 읽기

– 좋아하는 주제(필자의 경우 자전거웹진)의 영문 인터넷 사이트 매일 읽기

– VOA learning English 청취

 

에이! 그놈의 문법…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도 학창시절 문법 때문에 골탕을 먹어서 문법의 문,자만 나와도 구시대적 학습법이라고 고개를 돌리기 바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사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간단한 단어부터 무작정 따라 하면서 시작하는 것이지 문법 배우고 말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네이티브처럼 어머니 품에서 말을 배울 시간과 환경이 아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서 생활해서 잘하던 영어도 귀국해서 몇 년 안 쓰다 보면 다시 잘 안되는 것이 영어다. 외국어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기껏해야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라면 효율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정리가 잘되어 있고 체계가 잡힌 학습서는 결국 문법책이다. 하도 문법을 싫어하는 분위기다 보니 영어회화 패턴을 강조하는 교재가 유행이라는데, 말장난일 뿐이다. 그 패턴의 종합이 문법이다. 패턴에만 너무 젖어 있으면 상황이나 표현이 살짝만 달라져도 패턴을 응용 못하는 수도 있다. 시험을 위한 문법책이 아니라 사전을 찾아볼 필요조차 없는 비교적 얇고 쉬운 책을 정해 최소 스무 번은 읽어보자. 읽는 회를 거듭할수록 아, 영어 문장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구나! 하고 어렴풋이 큰 그림이 그려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다음은 좋아하는 주제의 영문으로 된 인터넷 홈페이지를 조금씩이라도 매일 읽는 것인데, 아무리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쯤은 관심사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야구나 축구가 어떤 사람은 패션이나 연예계에 흥미가 있을 수 있다. 그저 영어시험을 위한 학습서나 단어장은 오래 보고 있기 어렵고 뒤돌아서 안쓰면 쉽게 잊힌다. 흥미가 있는 홈페이지를 하나를 정해 주기적으로 읽으면 문법서를 통해 익힌 문법이 실제 문장에서는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할 수 있어 복습이 된다. 동시에 어휘를 자연스럽게 늘리기에도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듣기다. 미국의 소리 방송(Voice of America) 홈페이지에서는 learning English라는 섹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익히는 학습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 방송의 특성은 쉬운 어휘로 국제뉴스를 재작성하고 아나운서들은 되도록 천천히 읽는다. 기사전문과 MP3 파일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니 듣기 초보들에게는 꽤 유용한 컨텐츠이다. 단점이라면 이 방송의 스피드와 엑센트에 익숙해져 있다보면 듣기에서 네이티브의 빠른 스피드를 잘 못 따라갈 수 있고 본인이 말하는 스피드도 느려질 수 있다. 비키할머니도 한참 나중에 웃으며 이런 질문을 하였다.

 

– 미스터 자전거공작소! 당신은 항상 그렇게 말을 또박또박 천천히 합니까?

 

나이 든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대한다는 인상을 받은 듯하였다. 해명을 해야겠는데 구구절절 사연도 길어서 그냥.

 

– 영어 말하기에 충분히 익숙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말았다. 언급한 이 방법은 어쩌면 내상황에 적당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 영어와 담을 쌓고 산 사람이라면 또 그에 적당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처럼 네이티브와 길고 오래 대화를 한적은 없었는데 그간 영어학습을 통해 얻은 것을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도 알게 되었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가장 큰 수확은 이 방법대로 조금 더 꾸준히 하면 한단계 더 나은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점이다.

 

혹시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목표는 구체적으로 세우고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중요한 것은 각자 수준에 맞는 반복해서 읽을 교과서적인 책을 정하는 것과 흥미를 가지고 꾸준히 영어에 자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선정하는 일이다. 학창시절과는 달리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므로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바이크패킹

 

배가 제주항에 도착하자 늘 그렇듯이 마음 한구석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Vㅣ키 할머니를 비롯한 배에서 안면을 튼 자전거 여행자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할머니는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난 후 명함을 건넸다.

 

– 꿈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오면 테즈매니아에 꼭 들르세요. 웜샤워를 운영하니 공작소씨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웜샤워는 자전거 여행자들이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잠자리를 나눠주는 세계적인 커뮤니티다. 장거리 자전거여행에서 가장 간절한 부분이 씻는 것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동의하는 바이고 따라서 커뮤니티 이름이 웜샤워(Warm shower)이다. 회원들은 대부분 자신이 외국에서 도움을 받아봤던 터라 그 고마움을 다른 여행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되갚고 있다.

 

호주 하고도 테즈매니아…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몹시 먼곳이다. 나는 과연 그 이역만리까지 훗날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헛된 약속을 남발하기도 그렇고 해서 명함을 쳐다보며 멈칫하였다. 그것도 잠시, 안녕… 하는 인사에 고개를 드니 노구의 여행자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 이런 류의 담백한 이별. 완벽한 내 스타일이다.

 

금능해수욕장 캠핑장에서

제주를 여러 해 동안 자주 다녔지만 이번처럼 녹음이 짙은 계절은 처음이었다. 나는 무더운 계절에 포장도로를 장시간 타는 것에 심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여름엔 산악자전거로 한두 시간 산길을 타는 것이 라이딩의 전부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온몸이 익어가는 상황과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 못 하는 성향이다. 그러니 아무리 제주를 좋아해도 더운 계절은 무조건 피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편향은 아무래도 남은 인생의 페이지를 메꾸어 나가는 데에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계절의 제주는 또 어떤 모습인지 한 번은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떠나왔다.

 

여행의 성격이 앞에서 밝혔다시피 예행연습이다. 따라서 이번엔 숙박업소의 도움 없이 야영장과 텐트 신세만 지기로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 전체에서 자전거 캠핑이라는 측면만 떼내어 만족도나 개인의 적응도를 점수로 매긴다면 영락없이 낙제점이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야영장은 금능, 하모, 표선, 김녕, 함덕 야영장이다. 모두 해수욕장을 끼고 있고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다.

 

만족도가 높지 않은 이유는, 유명한 곳은 밤에 야영객들이 많아 소음이 심했고 대부분의 야영장엔 그늘이 없어서 낮시간엔 텐트 내부온도가 지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그늘을 만드는 장비를 추가하면 되겠으나, 자전거 여행은 무조건 짐을 줄여야 하니 여의치 않다. 가장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점은 역시 샤워였다. 해수욕장이 개장 전이라 그런지 샤워시설은 문이 닫혀 있었고 씻지 못한 끈적이는 몸으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하자니 잠들기 쉽지 않았다.

 

라이딩중 배고프면 먹었던 편의점 도시락

사일째 중산간 업힐을 하고 나니 씻지 못한 몸에서 땀띠 비슷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결국 항복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고 말았다. 씻는 문제에 대한 요령이 생기지 않는 한 자전거 캠핑은 나와 맞지 않는 여행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 결론이다. 몇몇 아재(?)들은 져지를 입은 채 수돗가에서 물을 끼얹다가 인적이 뜸한 틈을 타 웃통을 벗어버리고 씻던데, 같은 아재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딩 마치고 하모야영장 텐트앞에서

비록 낙제점이긴 하나 마냥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텐트를 치면 칠수록 요령이 붙어 더 빨리 더 그럴싸하게 설치하는 재미도 있었고, 하늘 아래 나만을 위한 단 하나의 공간에 누워 맥주를 홀짝이며 듣던 밤바다의 파도소리도 썩 괜찮았다. 소득이라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오래 캠핑을 하고픈 야영장 한 곳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언젠가 선선한 계절이 오면 그곳엔 한번 더 찾을 듯하다.

 

제주환상자전거길 서귀포방면에서 만난 환상적인 바다

동검은이 오름

 

라이딩 코스의 중심이 야영장이다 보니 하루 달리는 거리는 짧아지고 해안도로 위주였다. 해안도로는 이제 제주만의 독특한 정취를 많이 잃어서 나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땀으로 찌든 몸에서 빨간 점들이 올라올 즈음 이날은 야영을 포기하기로 하고 중산간의 지선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틀었다.

 

표선에서 국도 1132타고 성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혼인지 가는 지선도로가 나온다. 지선도로를 타고 1136번 도로를 향해 가는데, 이제 제주에서 자전거 타는 재미는 이런 지선에서 더 크게 느낄 수 있겠다, 싶다. 이 계절의 지선에는 도로 좌우로 산딸기가 유난한데, 크기가 작고 비실비실한 우리 동네와는 달리 장터에 나온 상품처럼 튼실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가시에 손가락이 긁히면서도 한참을 따먹었더랬다.

 

동검은이 오름 가는길

1136번에 자전거를 올린 뒤 수산사거리를 향해 달린 다음 송당리로 향했다. 몇 번 언급했다시피 송당리는 오름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중산간의 작은 마을이다. 제주에 와서 오름 한 군데도 오르지 않는다면 김 빠진 콜라를 먹은 것처럼 허전한 일이다. 송당리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로타리 식당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뉴스를 듣는데 기온이 삼십도를 넘었다는 거였다. 허허… 오월 중순에 폭염주의보라니… 어쩐지 올라오는데 무지하게 힘들더라니.

 

로타리 식당의 음식맛은 여전히 좋았다. 밑반찬까지 모두 탈탈 털어먹고 일어서는데 왠지 현지화(?)되어버린 듯한 여사장님의 안색에서 허전함을 느낀다. 육지것(?)으로 제주에 이주하여 이곳에 식당을 운영하게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을 아는 나로서는 이전의 명랑하던 모습이 더 좋았다. 주변 손님들을 둘러봐도 관광객보다는 현지 노동자들이 더 많았다. 소문이 나서 손님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제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음식을 해내야만 하는 바쁜 사람인 것이다.

 

동검은이 오름 가는 길 혹시 아세요? 하고 식당 주인장에게 물으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나는 감각에 의지해 오름 가는 길 입구를 찾고 탐방로 초입도 찾아냈다. 이날 지선에서의 라이딩과 동검은이 오름은 이번 여행의 큰 소득이었다. 푸른빛으로 치장한 제주의 산야는 그 어느 때보다 깔끔해 보였다.

 

동검은이 오름 오르는 길, 꽤 가파르다.
동검은이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들

다랑쉬 오름이 최고인 줄 알았더니 멀찍이 떨어진 동검은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엔 또다른 멋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제주가 더는 그립지 않다. 찾는 횟수가 줄고 주기는 길어졌다. 이유는 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변해가기는 하는데 육지와 흡사해진 탓에 매력을 많이 잃어서일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제주를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랑쉬만 고집하다가는 동검은이에 평생 갈 수 없다. 그러하니 이후로는 내게서 가장 낯선 곳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이 되어야 하리.

 

인생의 남은 페이지는 그리 많이 남지 않았고 채우고 싶은 것들은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바빠진다. 제주를 떠나오는 선상에서 일몰을 보고 있는데 또 내 입술은 고장 난 엘피판처럼 같은 노래를 구간반복하였다.

 

잘 정돈된 산지천 주변

– 어릴 적 함께 꿈꾸던 부푼 세상을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사는지.

 

안녕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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