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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제주에서 온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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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의 집.


내 컴퓨터의 즐겨찾기 카테고리에는 [제주표류]라는 제목이 있다. 2012년 봄, 제주를 자전거로 돌아보고 난 뒤 만든 카테고리다. 아, 나도 제주에서 살아봐야지! 하며 제주관련 정보수집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먼저 입도하여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의 블로그 주소로 가득하다. 그들이 어떻게 정착해 가는지 호시탐탐 엿보다가 좋은 때가 되면 제주이민을 결행할 계획이었는데 아직이다. 이러다가 결국 꿈은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 이후로 이렇게까지 제주의 인기가 급상승할지 누가 알았겠나. 


생각을 생각하는 나같은 성향의 사람은 아무리 원해도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혹시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가? 그렇다면 게으르게 미루지 말 것! 생각을 생각하지 말 것! 걱정을 걱정하지 말 것!


내가 참 안되는 이 일을 뚝딱, 하고 해낸 이가 [아서]이다. 그러니까 [아서의 집]은 즐겨찾기 카테고리 내에 있는 여러 블로그 주소의 하나이자 동시에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제주에서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에 생각을 하며 즐겨찾기 카테고리나 만들고 있을 때, 그는 2013년 가을 제주 하고도 구좌에서 게스트하우스의 영업을 시작하였다. 존경심이 절로 생겼더랬다. 나는 뭐든 내가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걸 나보다 먼저 시작한 이들을 덮어놓고 쉽게 존경하는 편이다.


아서님의 그림 [사랑하는 정남아] 중 일부


어쨌거나 천성이 게을러서 좋아하는 일 조차 잘 미루며 그 뭔가를 하기 전에 생각에 생각 걱정에 걱정이 많은 나는 요즘도 컴퓨터를 켜면 무슨 의식처럼 [제주표류] 내의 여기저기를 헤매인다. 상당수 초창기 제주이민을 떠났던 분들의 블로그 계정이 개점휴업 상태다. 새 포스팅이 없는 죽은 블로그가 대부분이다. 개인 미디어의 유행이 블로그에서 SNS나 유튜브로 옮아간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제주에서의 삶을 접고 다시 육지로 돌아간 분들이 많다. 


제주에서 이효리와 같은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려면 그가 지닌 수십억 자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댓글을 보고 쓴웃음이 난 적이 있다. 현실을 꽤 반영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효리보다 더 돈이 많아도 삶의 내용은 궁색한 사람이 많으니 너무 야박한 잣대를 그에게 들이댈 것까지는 없겠다. 재정적인 이유이든 다른 이유이든 적잖은 사람들이 제주를 떠났다. 그토록 원했던 삶이었는데도 오래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 반면 아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형태로,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씩씩하고도 때로는 여리여리하게 제주의 들판을 제주의 숲속을 제주의 꽃길을 바다를 누비고 있다. 정남이와 함께.


아서님의 그림 [사랑하는 정남아] 중 일부


정남이는 그림속 아서님이 키우는 개다.


엽서.


아서님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틈틈이 그린 작품을 엽서로 제작하였고 얼마전 이벤트를 통해 배포하였다. 자주 들르는 블로그인지라 이벤트 소식을 알게되었고 운좋게 선정되어 엽서를 받아보게 되었다.



블로그의 글과 사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허나 그 사람의 일부분인 것 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제주의 자연이야 엽서속 그림이 잘 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아서라는 그의 캐릭터는? 2013년부터 블로그를 통해 지켜봐온 바로는 딱 엽서속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 아서라는 사람이다.


어떤 사태나 인물을 보면 언어가 떠오르고 문자화된 스토리로 기억속에 저장하는 나같은 사람은 사연이나 정보, 인상등에서 핵심만 추려내 한장의 그림이나 사진으로 표현해 내는 아서 같은 사람이 처음엔 신기할 뿐이었다.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나같이 텍스트 위주로 사고하는 사람은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옷을 입어도 몹시 건조하게 먹고 마시고 입는다. 건조하다는 말은 밥은 배부르면 되고 술은 취하면 되고 옷은 잘 가려주면 된다는 뜻이다. 그 앞뒤로 꾸미는 말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가령 맛있는 이라든가 멋있는, 이런걸 크게 따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눈에 주먹밥에도 들꽃으로 치장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사람의 생활방식이 처음에 낯설어 보이는 건 당연지사. 어쩌다 한두번 그래보는 거겠지 했는데,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꽃과 예쁜것에 대한 애정은 그의 생활 전반에 깊게 물든 것이어서 누가 억지로 걷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하니 그의 그림도 이와 같으리라.


아서님의 그림 [사랑하는 정남아] 중 일부를 사진으로 찍고 흑백으로 변환


엽서를 오래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결같은 아서님과, 그의 제주살이를 떠올려본다. 자기가 한 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언행불일치의 세월을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창작과 삶 모두를 멋진 작품으로 완성해 나가는 그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허전함을 달래본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건강과 평화가 있기를./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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