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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늦봄의 제주1 비바람과 가파도 그리고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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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함께한 늦봄의 제주1 비바람과 가파도 그리고 청보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씻은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찍어온 사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진 늘 그랬는데 이번엔 짐이며 자전거를 대충 던져놓고 부족했던 잠과 지친 몸을 쉬게 하기에 바빴다. 이유는 사진 컷수가 적고 여행 자체가 힘들어서였다.

 

여행기를 건너뛸까 하다가 그래도 그게 아니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사진을 정리하고 자판을 두드려본다. 올 봄엔 제주를 잠시 아껴두고 선자령에 가고자 하였다. 그랬던 것이 봄바람 타고 건너온 가파도에 청보리가 한창이라는 소식과 푸르름이 한창일 때의 오름, 거기에 가시리 유채꽃길까지 눈앞에 삼삼하니 선자령 가던 발길을 제주로 선회하고야 말았다.

 

갑작스럽게 아침에 변덕을 부려 목적지를 바꾼 것과 허둥지둥 길을 나선 댓가는 이후 톡톡히 치루게 되는데 막상 자전거의 방향을 제주로 돌리니 늘 그랬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월에서 오월로 넘어가는 계절의 제주는 통상의 경우라면 여행하기 나쁘지 않은 계절이었다. 내 경험이 그러하니 이를 너무 과신한 면이 있다. 일기예보도 확인하고 온 터라 제주가 보여줄 아름다운 풍경에 기대가 컸다. 아,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자주 봤던 해안도로는 접어두고 새별오름과 가파도행 도항선 여객터미널이 있는 모슬포항에 바로 갈 수 있는 지방도 1135번에 접어들자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제주의 자전거도로에는 나 말고도 여러 자전거여행자들이 라이딩 중이었다. 잠시 쉬는 동안 자전거와 제주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살짝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 오늘 제주에 비 온다는 소식 없었지요?

 

- 예, 주간예보에도 없었고 주말쯤에나 전국에 비소식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서로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그들은 해안도로로 나는 중산간 가는 길로 헤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있게 한 이야기가 무색하게 눈앞의 건물이며 산과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더니 빗방울이 슬슬 굵어지기 시작했다.

 

 

 

 

지방도 1135는 1139 천백도로 왼편에 한단계 낮은 고도에 있는 길로 제주 서부쪽 중산간을 관통하여 남쪽 대정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경험해보지 못한 서부 중산간 길이고 중간에 서부쪽 오름을 대표하는 새별오름이 길 옆에 있어서였다.

 

비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더니 하늘도 잔뜩 흐렸다가 언뜻 파란 기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의 날씨가 늘 그랬듯이 내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겠거니 하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소길댁 이효리가 산다는 곳이 이 근처겠구먼, 하는 여유도 부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중산간에서 멀리 비양도가 보일 때 쯤 내 눈앞엔 거대한 새별오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문으로 들었던 새별오름 들불축제에 참가인원이 하도 많아서 어느정도 규모이길래 싶었는데 직접 확인해보니 과연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만한 크기의 큰 오름이었다.

 

 

지대 자체가 높은데다가 거기에 오름이니 정상에서 조망할 수 있을 풍경에 대단히 기대가 되었다. 주차장에 자전거 대놓고 가파른 탐방로를 허위허위 오르는데.

 

아……

 

이 다음부터 정상 그리고 그 이후론 사진이 없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풍과 그에 동반한 굵은 빗줄기로 카메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설령 꺼냈다 하더라도 사방은 온통 안개로 가득해서 발 아래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성인 남자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정도였으니 바람의 세기가 짐작이 될 것이다. 간신히 손을 먼저 짚어 버티었는데 하마터면 뒤로 넘어져 카메라 가방에 체중이 실려 장비를 망가뜨릴 뻔하였다.

 

정상에서 표지석만 겨우 확인하고 내려가는데 천둥에 번개까지. 살아야겠다 싶어 바짝 몸을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쏟아붓는 폭우였으므로 몸은 완전히 젖었는데 내리막이 시작되자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자전거여행자를 더 곤란하게 만든 점은 해안도로였으면 중간중간 정자라든가 버스정류소에서 비를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1135번 지방도의 경우 그마저도 눈에 띄지 않았다.

 

딱 이 도로는 제주도민의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도로로 보였다. 자전거로는 아마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거의 길이 끝나가는 대정읍에 와서야 비를 피할 만한 정류장이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 싸늘한 삼각김밥을 씹고 있는데 몸은 덜덜 떨려오고 참 봐주기 딱한 꼬락서니였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물을 뿜어내는 신발 그리고 축축한 느낌은 라이딩 의욕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가 오니 추사기념관도 그냥 지나치고 모슬포항을 찾아가기에 바빴다. 만약 도착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서 배편이 마땅찮았거나 했다면 이 시점에서 여행을 중단했을 지도 몰랐다.

 

배편의 여유도 있고 시간도 넉넉하여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계획대로 가파도행 두시 배를 탔다. 

 

 

15분 뱃길을 달려 가파도에 당도하니 그곳은 섬 전체가 온통 청보리 천지였다. 마침 비가 잠시 소강상태여서 그나마 다닐만 하였다.

 

 

 

 

 

 

 

 

 

 

속속들이 돌자면야 두시간도 좋은 곳이지만 주요 탐방로를 중심으로 도니 한시간 정도 걸렸다. 가파도 선착장 입구에는 자전거를 대여해주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이전 여행에서 만났던 자전거여행자가 가파도나 마라도행 도항선에는 자전거를 실을 수 없다는 말을 했기에 나는 시도하지 않았다. 항구에 잘 묶어두고 배를 탔다.

 

모슬포에서 가파도 가는 첫배는 아홉시를 시작으로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한시간에 한대꼴로 있고 가파도에서 나오는 막배는 오후 네시 이십분에 끊어지는데 관광객이 많은 시즌에는 추가되기도 하고 기상여건에 따라 배편이 끊기기도 하므로 미리 터미널에 확인을 하는 것이 좋다.

 

아무려나 날씨는 도와주지 않았지만 이 광활한 청보리밭의 색과 넘실거림을 보고 있자니 그나마 중산간에서 한 고생이 일부 보상이 되는 듯하였다. 가파도의 돌담은 제주의 그것과 형태와 빛깔에 차이가 있었다.

 

 

섬의 끝자락 보리밭이 끝나는 지점을 지나니 해안도로가 나오고 멀리 마라도가 보였다. 옆에서 걷던 할머니가 웃자고 소리친다.

 

- 짜장면 배달해 주세요오! 짜장면 짜장면…… 난 짬뽕이 싫어요.

 

해안도로를 따라가도 선착장에 갈 수 있지만, 풍력발전기가 있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시간도 단축하고 청보리가 더 보고싶어서였다.

 

 

 

 

 

 

 

탐방을 끝내고 선착장에 당도하니 제주는 다시 해무와 비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배를 기다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니 신발 옆으로 물이 비어져나왔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온몸이 젖은 상태여서 바람이 불 때마다 덜덜 떨었다.

 

국토의 남단 작은 섬 가파도의 청보리보다 더 가뭇없이 희미해지고 약해져버린 존재가 나였다.[자전거여행의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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