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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자전거여행기10. 해 지기 전에 송당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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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자전거여행기-해 지기 전에 송당리로


- 어르신, 여기서 송당리로 제일 빨리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지요?


따라비 오름 주변을 정비하고 있는 분에게 물었다. 오름 오기 전에도 길을 잘못 들어 지연이 되었고 오름에서도 제법 시간을 많이 보냈던 터라 주변이 슬슬 어두워져 왔다. 현지인 만큼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 조금이라도 단축된 루트를 알고 싶었다.


- 가시리 사거리 알지? 거기 오뚜기 슈퍼에서 정석항공관쪽으로 주욱 올라가, 그러면 또 항공관 지나서 내리막이 나오는데 계속 직진이야.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쭈욱 직진하면 송당리 사거리 나와. 제일 빠르고 제일 찾기 쉬운 길이지.


처음 들었을 땐 맥이 탁 풀렸다. 아까 올라갔다가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려니 손해 보는 기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 길이 제일 빠르다는데.


관광모드의 라이딩을 할 수 없었다. 좀 밟았다.



비행장쪽에서 새를 쫓느라 공포탄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마음은 급했는데 서쪽으로 해지는 광경이 볼만하였다. 좀 이른감이 있지만 자전거의 안전등을 켰다. 자동차 운전자에게 자전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인데 개인적으로 자전거 시트포스트에 장착하는 것보다는 등가방에 다는 걸 선호한다. 뒤에서 봤을 때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분실이나 파손에 더 안전해서 그렇게 한다.


전조등은 만일을 위해서 핸들바에 장착만 하였다. 더 어두워지면 사용하기로 하였다.



정석항공관


요즘 이래저래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항공사에서 만들어 놓은 항공기 관련 박물관이다. 기업의 세습구조나 오너 중심의 경영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냐에 관해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 사건이 얼마전 발생하였다. 정석항공관의 정석(靜石)은 그 기업의 창업주 호이다. 고요한 돌이라는 뜻인데 부디 후대 사람은 그 뜻의 의미를 잘 새길 일이다.


주변의 비행장에선 이 회사 파일럿 과정으로 입사하면 경비행기 조정과정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는 떨어지고 오른편으로 송당리의 오름들이 나타났다. 저기를 하나하나 오를 생각을 하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났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헤드라이트가 불을 밝히기 시작할 무렵 송당리에 도착하였다. 가까스로 자전거의 전조등을 켜는 일은 면하였다. 송당리엔 다른 관광지에 비해 많은 수는 아니지만 게스트하우스가 세군데 정도 있다. 잘 알려진 곳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비수기임에도 하룻밤 쉬어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지난 가을에 송당리를 지나가다가 마무리 공사에 한창이던 게스트하우스를 본 적이 있다. 해서 기억속의 송당초등학교 근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영업중이었다. 새 게스트 하우스의 문을 두드리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손님은 나 뿐이었고, 주인장 대신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장기숙박중인 스텝이 이런저런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 일단 저녁식사가 급했다.


제주의 식당, 특히 이런 한적한 시골에 있는 식당일수록 당일 사정에 따라 문을 일찍 닫는 경우가 있다. 재료가 떨어지거나 손님이 없거나 주인장의 가정사 때문이거나. 송당리엔 가정식 백반을 파는 곳, 이탈리안 레스토랑, 돼지고기구이집 정도가 있는데 확실히 식당은 적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이 제주도 시골 구석까지 찾아오는 관광객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숙박비를 계산한 뒤 샤워도 미루고 서둘러 식당으로 뛰어갔다.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는 대부분 이층침대이다.


게스트하우스 거실


이전에 들렀던 돼지고기구이집에 들어가 삽겹살을 시켰다. 제주 하면 또 돼지고기가 유명한데, 사실 토종 제주산이냐 아니냐는 맛에 크게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주에서 소비되는 돼지고기의 상당량은 제주산으로 보기 어렵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기를 두껍게 썰어주고 제주 특유의 멸치젓이나 자리젓을 종지에 담아 주는데 익은 고기를 젓갈에 찍어서 먹는 맛이 독특하다. 것이 유행을 타고 육지에까지 들어와 제주식으로 삼겹살을 파는 집이 제법 성업중이라 한다.


이 가게는 제주산이라는 명목으로 터무니 없게 비싸게 팔지 않아 좋았다. 



시골의 작은 가게지만 주인장 부부의 성격이 깔끔해서인지 내부와 음식이 정갈했다. 주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여행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워나갔다. 작은 마을에 숙소가 들어서고 조용하던 동네가 낯선 사람들로 웍더글덕더글해지는 것이 반가울 토박이들은 없다.


같은 값이면 이렇게 동네 식당을 찾아 동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덕보는 일을 만들어 주어야 서로서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손님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 식당 찬모가 고기 구울 줄 몰라 태우고 앉았는 꼬락서니가 안되어 보였던지 직접 집게와 가위를 들어 도와 주었다. 맛있는 저녁이었다.


- 사장님, 제가 작년에 들렀을 때 다시 온다 약속했었죠? 내년에 또 옵니다. 그 땐 먼저 알아봐 주세요.


동네 후배와 술잔을 섞던 사장님이 그랬냐? 하며 같이 술 한잔 하잔다. 또 제주를 찾을 일이 생긴 거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넓은 방을 스텝과 나 단둘이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용하는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지만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다. 어쩌다 나라에 제주에서의 삶이 유행처럼 번져나가 연예인들도 제법 이주를 한 것으로 안다. 사오년전 일찍 이주하여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사정이 좀 낫지만, 최근 일이년 사이에 제주에 정착한 이민자들은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이 적지않다, 한다.


제주는 내가 알기로 전국 평균 임금이 가장 낮은 곳이고 산업기반 자체가 그렇게 탄탄하지 않다. 해서 아름다운 자연에 끌려 이주를 하였다가도 먹고 살 일이 막막하여 다시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전언이다.


이민자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이 게스트 하우스나 카페인데 이것도 사실 포화상태이다.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산이나 월정리 해변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낫지만 그 이외의 곳은 비수기 때면 경영여건이 급격히 악화되어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인건비조차 건지기 어려운 현실이다. 치솟은 부동산 가격은 논외로 해도 그렇다.


언제 올지도 모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365일 부부가 영업장에 매여 있어야 하니 은퇴 후 노후를 즐긴다는 개념이 실종되기 십상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템이 없이는 생존이 어려우니 이제 제주마저 육지와 차이가 없는 살벌한 경쟁의 장이 되고 만 것이다.


혹시 제주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여 여행중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기존의 유명한 곳보다는 최근에 생긴 곳도 고려해보길 바란다.


조용하고, 깨끗하며 넓게 혼자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쓰다보니 광고 같군. 흠……. 너무 한곳만 밀어주지 말고 공정(?)한 소비를 하자는 공익광고쯤으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거실 책꽂이에 들장미 소녀 캔디 시리즈가 꽂혀 있었다.



안소니 녀석의 면상을 다시 확인하니 새삼스러웠다. 당대 소녀들의 눈높이를 너무 올려놓은 주범이다. 2권까지 읽다가 잤다.




어제 무리를 했는지 늦잠을 잤다. 스탭이 조식을 먹으라고 깨웠다. 아침 안먹는데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의 안사람이 호박죽을 일부러 쑤었다며 먹으라 성화였다. 대부분의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조식으로 빵이나 삶은 달걀 커피등이 주를 이루는데 호박죽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죽 뿐만이 아니라 토스트에 맥반석 계란에 수제 잼까지 손님에 대한 대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하였다.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아침에 주변 오름 한곳을 정해 투어를 진행한다. 자전거로 다니면 되지만 남녀스텝도 같이 가자 부추기던 터라 참가하게 되었다.


강아지의 목줄을 풀자 오름 가는 줄 알고 주차장으로 쏜살같이 달린다. 늘 묶여 있느라 오름 가는 시간만 되면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고 한다.


승합차에 몸을 싣고 오름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다랑쉬오름이었다.



용눈이 오름과 아끈 다랑쉬 오름.


오름투어의 목적지를 다랑쉬 오름으로 정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지난 가을에 송당리를 들렀다가 올라보지 못한 오름이 다랑쉬 오름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에는 우도 들렀다가 종달리에서 송당리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왔었다. 제주 동부쪽에 있으면 송당리로 접근하기는 어렵지 않다. 길이 워낙 많은 탓이다.


그때는 딱히 송당리나 오름구경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냥 기억속의 용눈이 오름이 다시 보고파서였고 전날 중산간의 길이 워낙 좋았던 터라 그냥 그렇게 자전거 바퀴를 굴렸더랬다.


종달리에서 용눈이 오름 가는 길.


제주 동부에는 당근밭이 많다.



가을에 중산간으로 가는 지선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딱히 올레길이 아니더라도, 아니지 오히려 올레길은 올레꾼들이 많으니 이런 알려지지 않은 길이 정취가 독특하다.



주차장 근처에 자전거 대놓고 오름 입구로 향했다. 오름의 입구는 통로가 한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게 나무로 리을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방목해 놓은 소들이 탈출을 하지 못하게끔 그런 형태로 만든다고 한다.


용눈이 오름은 찬찬히 둘러보자면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높이는 그렇게 높지 않아 오르는데 힘들지 않지만 둘레가 제법 된다.





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본 아끈다랑쉬 오름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화산재로 이뤄진 토양이라 지반이 약하다.




요즘은 오름의 명성이 많이 알려져서인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광객들이 적잖이 찾고 있다.




일출랜드쪽 들판과 풍력발전기들은 다시 봐도 장관이었다.





여러개의 굼부리가 뭉쳐져 있는 용눈이 오름이라 정상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는 여행객들.



이해 가을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다랑쉬 오름을 바라보다가 그 아래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보게 되었다. 우와, 한바탕 달리기 좋은 길이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긴 한번 달려보아야지.



하며 다시 내려가 자전거에 오르자마자 접어든 농로가 아끈다랑쉬 오름 가는 길이었다. 왼쪽의 다랑쉬와 비교해보면 아끈다랑쉬는 그야말로 아기오름이다.




좁은 길을 질풍같이 달려 당도한 곳이 아끈다랑쉬 오름 입구였다. 바로 옆 다랑쉬오름을 오를까, 하다가 다랑쉬오름은 척 봐도 상당히 높은 오름이었다. 규모면에서는 오름 중에 제법 큰 축에 드는 오름이다. 해도 슬슬 떨어지려 하였고 걷느라 자전거 타느라 부실한 발목도 아파와서 꾀를 부리며 스스로와 타협한 결정이 아끈다랑쉬 오름이었다.


그래, 이번엔 일단 작은 거부터 올라보고. 


그러나 이 의미 없는 결정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을 줄은 오르기 전에는 몰랐다.






작은 혹은 아기라는 뜻의 아끈인 만큼 오르는 길도 좁고 미끄러웠다. 중간중간 기다시피해서 정상부에 오르니 그때부터 세상엔 나와 오름과 억새 그리고 하늘이 전부인 또다른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먼저 걸었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건들바람이 불었다. 맞은편에서 시작한 억새의 파도가 내 눈높이까지 밀려왔다 밀려갔다. 바람의 흔적을 따라 서로 몸을 부대끼며 흔들리는 꽃의 무리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주체 못할 황홀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날 메모장에 아래와 같이 썼다.


「억새와 바람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산 영혼이 제멋대로 뒤섞여 한바탕 군무를 펼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자전거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름에 혼을 빼앗겨 걷다가 허방을 짚기도 하였고 내려온 후로도 정신을 수습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더랬다.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겪었던 황홀이 이러하였으니 올 가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투어용 승합차가 다랑쉬 오름에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자전거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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