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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제주자전거여행기8. 1100도로와 산록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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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자전거여행기-1100도로와 산록도로


본격적인 이튿날 여행기를 이어가기 전에 다시 지난 가을 제주자전거여행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해안도로 위주의 라이딩에 익숙해지고 약간 물릴 때쯤 계획했던 것이 1100도로 라이딩이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최단시간 횡단하는 도로는 두개가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왼쪽이 제2횡단도로(지방도1139) 1100도로이다. 도로의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100미터여서 통상 그렇게 부른다. 제주시 노형동에서 시작해 서귀포시 대포동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제1횡단도로(지방도1131)는 제주시청에서 시작해 서귀포시청까지 이어지는데 성판악 휴게소가 중간에 있어 백록담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도로다.


나는 두 도로를 모두 횡단해 보았다. 1횡단도로는 제작년 봄에 2횡단도로는 작년 가을이었다. 1100미터라는 상징성 때문에 여행목적이 아닌 속도위주의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번쯤 달리는 필수코스가 되어버린 길이 제2횡단도로 이른바 천백도로이다. 두 도로 다 라이딩의 난이도는 크게 높은편은 아니다. 주변 경관은 1번횡단도로가 나았고 높은 곳에서 이어지는 여행코스 잡기에는 2횡단도로가 나았다. 


사람에 따라 제주의 좋아하는 계절도 차이를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봄보다 가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작년 가을 1100도로와 계획에 없었던 제2산록도로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이다.


지방도 1139, 천백도로 라이딩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노형오거리에서 제주고등학교를 찾아가 중문, 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방향을 잡으면 된다. 거의 외길이고 갈림길에선 서귀포나 중문방향으로 나아가면 길을 잃을 가능성은 없다.





1100도로의 초반은 급격한 경사보다는 은근한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해서 자전거 타는 입장에서 지루하고 처음부터 무리를 하면 쉽게 지칠 수도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의외로 경관이 답답하다고 느끼기 쉬운데 수풀이 우거져 있는데다가 지형상 탁트인 전망을 좀체 볼 수가 없어서 그렇다.


방목되어 있는 짐승들과 겁 많은 노루가 출몰하여 가끔 심심함을 덜어주곤 하였다.




날씨마저 흐리면 시선 둘 데도 별로 없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곳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주는 계절의 특성마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이유는 천백도로를 달려보면 알 수 있다. 제주시내에는 단풍이 아직인데 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뭇잎의 색이 울긋불긋해졌다.



천백도로의 단풍은 어리목입구교차로에서부터 조금 볼만해진다. 자라고 있는 나무 자체가 고운 빛깔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주종이라 그 이전까지는 가을 단풍이구나, 싶은 풍경이 그렇게 없다.



천백도로 라이딩 중 가장 단풍이 볼만한 한밝교 계곡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는데 자동차의 클랙션 소리가 울리더니 차창이 열렸다. 얼굴의 반을 선글라스로 가린 젊은 여자가 생뚱맞게 대한민국,을 외치며 박수를 치고 힘내라는 둥 야단이었다.


이럴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난감하다.


적잖이 겪었는데도 그렇다.



마지막 고개를 넘어 작은 규모의 습지를 지나면.



천백고지 휴게소에 다다르게 된다. 멀리 한라산은 달력상으로는 가을임에도 상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날은 아침에 편의점에서 김밥을 샀는데, 천백고지에서 먹으려 포장을 여니 싸늘하게 식어 있어 흡사 얼음덩어리를 씹는 맛이었다. 늦가을에 천백도로를 계획하고 있다면 조금 두꺼운 자전거복장이 필요하다. 적어도 장갑만은 겨울용이어야 손이 시렵지 않다.


내내 흐리던 날씨도 자전거를 탄 여행자가 가장 높은 고지에 당도하자 마치 기다렸다는듯 파란 하늘을 열어주었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니 두 계절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이러니 제주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하얗게 변한 한라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전거 아니면 내가 내 힘으로 이 높은 곳까지 올일이 있었을까, 싶어서 식어빠진 김밥을 우물거리며 청승맞게 슬쩍 안구가 흐려졌던 기억이 있다.


휴게소에는 따뜻한 음식이 김을 내며 유혹하였다.




어떻게 올라온 천백고지인데 싶어서 주변을 어정거리며 돌아다녔다. 제주는 비가 와도 토양의 특성상 지하로 빠져버리지 물이 흐르는 곳은 흔치 않은데 이 높은 곳에 습지가 있다니 신기하였다. 둘러볼 수 있게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서 구경하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같이 다닌 여행용 자전거, 노쇠의 기미가 여기저기 보인다.



천백도로 길가엔 산악인 고 고상돈씨의 동상이 서있다.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쉰세대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던 인물이다. 나라의 형편이 옳게 뭐 하나 내새울 게 없던 시절 이 양반의 최고봉 등정 소식은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당시 큰 일을 해내면 누리던 호사가 꽃다발 목에 걸고 카퍼레이드하는 것이었는데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옛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그 이후 산에서 사고를 만나 동료 둘과 불귀의 산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서리 낀 한라산과 주변 구경을 한참 하고 나서 다시 정처를 정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여행목적이었던 천백고지에는 이미 와버렸으니 다음 일정에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더랬다. 이 당시에도 나는 해안도로며 서귀포쪽의 유명 관광지는 이전에 대충 훑어보았던 처지라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불현듯 든 생각이 그래, 이번엔 중산간의 도로를 따라 되는대로 흘러다니자, 였다.


자전거를 중산간에 올려놓기가 버거워서 그렇지 일단 한 번 높은 곳에 오르게 되면 중간에 급할 때 원하는 곳으로 바로 떨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도를 펴놓고 눈길이 가는 길은 한라산 밑자락 제주의 어깨쯤이 되는 지방도 1115, 제2산록도로였다. 일단 산록도로를 타자면 탐라대학교 사거리로 가야 했다. 자전거에 올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느라 겪은 고생을 한 번에 보상 받는 내리막의 연속


고도가 낮아지니 다시 단풍이 보인다.



거린사슴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귀포방면


폐교된 탐라대학교 사거리에서 산록도로따라 제주의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2산록도로에서 자전거여행자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억새였다.


제주 사람들은 무슨 동네이름 길이름 짓는 학원을 다니는 것인지 지명이나 도로명이 하나같이 멋드러진다. 입으로 산록산록 하면서 페달을 밟았다.



1산록교 아래




이날은 단단히 취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랬다. 길에 취하고 가을에 취하고 자전거타기에 취하고 제주에 취했다. 취한 채 달리고 달리다보니 자전거는 어느덧 산록도로 지나 서성로(지방도1119) 지나 가시리 사거리에 당도해 있었다. 물 한모금 들이키고 있자니 낡은 트럭이 속도를 늦췄다. 차창이 열리더니 초로의 하루방이 소리를 버럭 지른다.


- 성산일출봉! 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알아 먹었다. 하루방이 재차 성산일출봉! 타! 하였다.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성산일출봉까지 가니 태워주겠다는 의미였다. 하마터면 탈뻔했다. 통상의 어르신들은 자전거여행자들을 한참 나이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고 나의 경우 자전거가 작아서 타인에게 더 힘들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당신이 보기에 어린녀석이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싶었다.



도회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친절이라 반사적으로 트럭쪽으로 몸이 움직이다가 멈췄다. 나는 자칭 자전거여행의 기술자 아니던가. 허리를 몇번이고 숙이며 거절하였다. 아쉬운 표정을 남기고 하루방의 차가 멀어지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너무 멀리왔군.


가시리…… 마을이름이 가시리라니.




마음 착한 하루방이 사는 곳 가시리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을이름만큼 정이 가는 곳이었다. 나는 이 해 가을에 이어 올 가을에도 가시리를 다시 찾게 된다.





해는 좀 남았고 가시리에서 성산일출봉까지는 자전거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 이쯤에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자, 오늘은 성산에서 자자, 하고는 성읍민속마을까지 가서 자전거의 방향을 온평리 해안도로쪽으로 돌렸다. 이래서 중산간의 길이 목적지로 빨리 이동하는데에는 유리하다 한 것이다.


온평리 해안도로


환해장성



멀리 눈에 익숙한 일출봉이 보이자 한눈을 팔았다. 그 바람에 날카로운 도로의 턱을 급하게 지나고 말았다. 푸시식, 하며 앞바퀴의 바람이 빠졌다. 전형적인 스네이크 바이트로 튜브에 구멍이 두군데 나 있었다. 일출봉 바라보며 펑크 때우는 맛이 그럴싸 하였다.


지체된 시간은 오분.



벌써 네댓번은 구경한 일출봉이라 나는 재빨리 숙소부터 잡고 씼었다. 숙소를 나와 성산에만 오면 들르는 돼지고기집을 찾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먹는 요령이 없어 늘상 태워서 먹던 고기를 이날은 적당히 잘 구웠다. 잘 익은 고기 한점에 한라산 소주를 호로록(?) 목으로 넘기니 온몸으로 기분 나쁘지 않은 짜릿함이 번졌다. 하루동안 달린 길을 떠올려보았다.





천백, 산록, 서성, 온평리 해안도로 그리고 지금 여기 성산.



몹시 만족스러웠던 라이딩이라 내심 흐뭇해하며 소주 한잔을 더 들이켰다. 근육을 따라 또 한번 기분 나쁘지 않은 통증이 전신으로 흘렀다.



자전거 여행자를 잘 대접해준 제주의 가을, 제주의 길,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이날 소주 한라산에게 마지막으로 취하고야 말았다./자전거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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