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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공작소통신

제주자전거여행기3. 멀어지는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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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자전거여행기-멀어지는 부산항


11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가을해는 길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어둑해진 도심을 지나 연안여객터미널 내부로 접어드니 적지 않은 수의 단체관광객들이 인솔자의 호명에 따라 승선권을 전달받고 있었다.


인원수가 적지 않아 아무나 잡고 호기심에 물어보니 합천의 두개부락 친목회원들 85명이 단체로 제주관광을 나섰다는 거였다.


- 이렇게 한 번에 같이 관광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네요.


하였더니 사람 좋게 생긴 할머니가 답했다.


- 날짜 정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윤달이 끼어 있어서 제사도 없고 경조사도 없어서 가능했답니다. 이래 배타고 새벽에 내려서 한라산 등산을 가기로 했지요. 


단체손님마저 없었더라면 배는 더 썰렁할 뻔하였다.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배가 출항하기 30분 전이 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일시에 개찰구로 몰리기 시작하더니 제법 긴 줄이 만들어졌다.


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도 했는데, 매번 신기한 것은 이렇게 줄을 미리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국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끔 눈치를 살피다가 어물쩍 새치기 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1퍼센트 정도 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문제는 입구가 열리지 않았는데도 긴줄의 구성원으로 처해 있다보면 뒤에 사람들에 의해 계속 전진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점이 나는 때때로 한심하였다. 


작년 목포에서 제주가는 배를 탔을 때의 일이다.



배가 접안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긴줄을 만들었고 나는 자전거를 미리 빼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서둘러 긴줄의 대열에 합류하였더랬다. 그 날도 마늘농사를 지으시는 해남의 할머니부대들과 수학여행을 막 시작한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이야 인솔교사의 통솔에 따라 객실에 머물러 있었고 고된 농사일에 관절이 적잖이 굽은 할머니들이 먼저 줄을 섰는데 나는 그 중간에 청일점으로 서 있었다. 서 있으려니 허리를 잘 못펴는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 아자씨, 그래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앞으로 좀 갑시다.


- 할머니, 아직 배가 접안하고 계단을 설치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앞으로 가봐야 문이 안열리니 소용이 없어요.


하고는 길을 터줬다.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듣고 영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는 나를 추월해 나갔다. 뒤에 할머니들도 나를 추월해 출구를 향해 앞사람의 등을 밀며 전진 전진을 계속 했는데 모두 닫힌 문앞에 막혀 옹송거리게 되고 말았다. 무릎관절이 안좋은 할머니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기하는 시간이 십분을 넘어가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읖조렸다.


- 워매…… 일없이 서둘다가 우리가 큰 벌을 서네이. 아이코 무르팍이야.


팍팍해진 무릎을 두드리며 다들 주저앉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며 혀를 차던 장년의 부부는 나중에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새치기를 하였는데, 나는 뭔가 뒷맛이 개운찮아서 주변을 살펴보게 되었다.


앵글로 색슨 계열의 배낭을 짊어진 백인남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피부색이 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척봐도 몽골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와 회교권 모자를 머리에 써서 중앙아시아계로 보이는 젊은 남자도 우리처럼 출구를 향해 몰려 가지는 않고 있었다. 서두르거나 밀고 당김이 없는 여유가 이방의 그들에게는 있었다.


왜 서둘러 출구를 향해 줄을 만들고 몰려 가지 않으면 불안한 것일까? 슬쩍 반칙도 서슴치 않으며 남들보다 한발짝이라도 앞줄에 서지 않으면 어째서 못견뎌 하는 것일까? 나를 비롯한 이웃들의 이 모습이 우습기도, 슬프기도 하였다.


출구를 항한 질주는 큰배 작은배를 가리지 않았다. 우도에서 성산으로 나오는 페리에서.


그런저런 일들이 떠올라 이번엔 천천히 의식적으로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아무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나서야 느릿느릿 움직였다. 경찰관 입회하에 확인이 이뤄지고 신분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파라다이스호 후미로 자전거를 싣기 위해 접근하자 화물적재함이 이미 닫히고 있는 상황. 선사의 직원은 내릴 수 없으니 객실 계단으로 자전거를 들고 올라가서 직원의 지시를 따르라고 하였다.


역시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거였나?


또 다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순간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오르는 계단을 따라 자전거를 들고 오르니 마침 나보다 먼저 개찰구를 빠져나갔던 자전거여행객도 화물칸에 자전거를 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해서 직원의 지시에 따라 함께 난간에 자전거를 묶어두게 되었다.


안될 것 같다가도 어떻게든 되는 곳이 한국이었다.



쿵, 하는 기계음이 울리고 바다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사람을 놀래키기에 충분한 뱃고동 소리가 길게 부산항의 밤하늘을 흔들었다. 


뿌우 뿌우 뿌우…….


선박의 스크류가 바삐 움직였고 배는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천천히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승선권을 확인하며 객실을 찾아가기 바빴으나, 나는 배가 항구에서 완전히 멀어지기까지 벌어지는 장관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이 야경은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배에서 바라보이는 영도대교 야경.



경관조명이 아름다운 부산항대교.





속도를 높이던 파라다이스호가 제궤도에 오르자 도회의 불빛은 한점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한기를 느꼈다.


다음날 7시까지의 긴 뱃길이 시작된 거였다.


파라다이스호의 잠못 이루는 밤.


어둠과 추위를 피해 선내로 들어오니 화물차 차주들이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배 내부에는 매점과 오락실 노래방등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용객은 크게 없었다.


음료수를 사러 들른 매점의 운영자가 세월호의 여파로 손님이 많이 줄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턴가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일이 이땅에 잦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리 듣기 싫어서 더 배를 타고자 하였던 것이다.


운영되던 식당도 손님이 줄어 문을 닫았고 대신 도시락과 파전을 내게 되었다는 사설로 이어지자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합천면의 단체손님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아 이상했는데, 칸막이로 구분된 선실 내부를 휙 둘러보니 미리 준비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순배씩 반주도 하였는지 다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윽고 어디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이 돌고 돌더니 떼창(?)이 시작되었다.


레퍼토리는 주로 뽕짝이었다.


이쪽 칸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청춘을 돌려달라고 가슴을 팡팡치며 노래 부르면 저쪽 칸에서는 이에 질세라 섬마을 총각 선생님에게 애절하게 서울에는 가지 말라고 발을 구르며 용을 꽁꽁 썼다.


다급해진 사람은 승객의 안전한 여행을 돕는 이남선 사무장이었다.



그는 승객명단을 들고 배 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의 배정을 바꿔주었다. 이런 일이 흔한 것이여서인지 재빨리 단체여행객과 일반여행객을 분리해 소음이 불편한 손님들이 최대한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나는 떼창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남성 합창 소리와 운문사 여승들의 아침 예불 때 염불소리 만큼이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울림이 있었다. 




연돌에선 불완전 연소된 연료가 불꽃놀이처럼 암흑의 천공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노래소리도 함께 밤바다에 울려퍼졌다. 일찌감치 잠들기는 글러버렸구나, 생각하며 맥주 한 잔을 마신 다음 자리에 누웠다.


아스름하게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 미스김도 잘 있어요 미스리도 안녕히 온다는 기약이야 잊으려마는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마라. 버리지마라. 아아아아, 또 다시 찾아오마 부산항구야.



나는 어이없게도 이 의미 없고 덧 없는 가사와 가락이 모든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날 파라다이스호는 늦게까지 잠에 들지 못하였다./자전거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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